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서파관 사건 (문단 편집) === 펑전과 루딩이의 몰락 === 1966년 3월 17일 항저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가 소집되었다.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린뱌오, 펑전, 캉성 등과 자치구, 성 중앙국 1서기 등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했는데 마오쩌둥은 그 자리에서 펑전이 독립적인 왕국을 경영했으며 펑전, 우한, 우렁시 등을 자산계급 문화 전파자라고 맹비난했고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 중학, 소학까지 계급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발언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학생들이 소동을 일으키게 하라. 우리에겐 맹목적인 믿음이나 규제가 필요없다. 우리는 새로운 지식분자, 새로운 관점, 새로운 창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수들을 뒤집어 엎는 학생들이다." 한편 뤄루이칭은 3월 18일 혹독한 조사를 견디지 못하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투신자살]]을 시도했지만 발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만 부러졌고 이것은 그의 유죄를 결정적으로 입증해 버렸다. 류사오치는 "그는 머리부터 뛰어내렸어야 했는데, 살고 싶은 마음에 발을 앞으로 모으고 떨어졌다."고 비웃었고 덩샤오핑도 뤄루이칭이 "마치 얼음과자처럼 떨어지더라."고 조롱했다. 죽지 못한 뤄루이칭은 즉각 바구니에 담겨 비투회에 끌려나가 치욕스러운 조리돌림을 당했다. 3월 27일 마오쩌둥은 항저우에서 캉성과 장칭을 불러 베이징 시당 위원회와 중앙위원회 선전부가 좌파를 지지하지 않고 악인을 보호하고 혁명에 반대했으므로 해체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 베이징시 위원회의 상황은 '바늘 한개도 들어가지 않고 물 한방울도 스며들지 않는다'는 옛말 그대로다. 그렇기 때문에 해산시켜야 한다. (...) 우리는 염라대왕을 타도하고 귀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마오쩌둥은 다시 한 번 우한을 반당, 반사회주의자로 비난했고 <전선> 잡지에 실린 <삼가촌찰기>를 비난하며 덩퉈, 랴오모사를 극렬히 비판했다. 캉성이 마오쩌둥의 이러한 의사를 저우언라이에게 전달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즉각 펑전이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고 주석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고 맹비난하며 마오쩌둥의 의사에 충실히 따랐다. 4월말에 펑전은 가택에 연금되었다. 펑전 다음에는 오인소조의 일원이자 선전부장 루딩이가 숙청되었다. 그 역시 펑전과 우한을 옹호하였는데 1966년 2월 [[장칭]]과 [[린뱌오]]가 상하이에서 소집한 군사회의에서 두 사람은 "문학 영역과 대다수 교수들이 우리의 정치적 견해를 지배하려는 흑방 역할을 해왔다."고 맹비난했다. 특히 린뱌오의 아내 예췬은 루딩이의 아내 옌웨이빙과 깊은 원한이 있었다. 옌웨이빙은 린뱌오에게 예췬이 음란한 여자라서 바람을 피우고 있으며 린뱌오의 딸 린리헝에게 예췬은 사실 친모가 아니란 식의 비방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